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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

작성일 21-05-26 12:38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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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자 베르 조회 1,707회 댓글 0건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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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웃집 지붕에 앉아 우리집 연못을 노리고 있는 왜가리연못의 물고기를 노리는 왜가리


박남준 시인은 동네 맑은 물에 사는 버들치들에게 모이 주는 걸 낙으로 삼았답니다. 그런데 어느날 버들치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.  외지인이 지나가다 버들치를 다 잡아간 때문입니다. 버들치 시인은 며칠 식음을 전폐하면서 버들치에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무장해제시킨 자신을 탓했다고 합니다.

"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"

시인이 한 시에서 이렇게 탄식한 적이 있는데 이때 심정이 그렇지 않았을까요.

2021년 봄 한국을 방문하고 5월 하순 독일로 귀국해 보니 집 연못에 제일 큰 물고기 한마리가 죽었는데 기르던 물고기인지라 아내가 마당 한켠에 묻어 주었다고 합니다.  집 마당에 제가 한 3년 정도를 설렁설렁 삽으로 땅을 파서 만든 연못을 개장할 때 팔뚝만한 물고기들을 사다가 풀어 놓았었습니다.  그런데 며칠도 안돼 거의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.  왜가리(Fischreiher)라는 놈이 다 잡아 먹었기 때문입니다.  어항속에서만 자란 물고기들은 천적 개념이 없어 왜가리를 피하지 않고 멀뚱멀뚱하거나 오히려 먹이를 주는 줄 알고 다가갔다가 잡아먹힌 겁니다.

그 살상의 현장에서 딱 한마리가 살아남았는데 이번에 죽은 바로 그 녀석입니다. 놈은 혼자만 살아남으면서 제대로 두려움을 학습했는지 어쩌다 왜가리가 한번 휘젓고 가면 한 일주일은 수면으로 나오질 않을 정도로 지독하게 몸을 숨겼습니다. 한번은 보름이 지나도 보이질 않아 잡아 먹힌 걸로 알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너무 반가워 눈물이 핑 돈 적도 있습니다.

이 녀석 말고는 연못의 분수에 맞게 아주 조그만 물고기들만 풀었는데 혼자만 덩치가 큰 이 놈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듯 가끔 폭군처럼 굴어댔습니다. 제가 모이를 주면 자기 혼자 먹겠다고 갑자기 꼬리를 요동쳐서 조그만 물고기들을 쫓아내기 일쑤였습니다. 그렇게 욕심 많은 놈이라 오래 살 줄 알았더니 제가 집을 비운 동안 명을 달리했다고 합니다.

그동안 덩치에 걸맞지 않게 비좁은 연못에 사느라, 왜가리 피해 숨어 사느라 고생 많았다. 편히 쉬거라.

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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